전시 내용

옥사자

1939

1939년 6월 29일 첫 체포

1940

1940년 5월 29일

최제형  [22세, 남] 사인: 급성 폐렴

1941

1941년 4월 15일

최복수  [42세, 남] 사인: 폐결핵

1942

1942년 7월 14일 직후

한순기  [52세, 여] 사인: 삼출성 늑막염증

1942년 7월 14일 이후

김규옥  [47세, 여] 사인: 만성신장염

1942년 7월 25일 이후

문태순  [45세, 남]

일본  도쿄 도요타마(豊玉) 형무소에서도 

옥응련(1921-1942)이 4년 선고를 받고 복역 중 옥사

옥사자 최복수

•1899년 전라남도 목포 출신

•1928년 경성부 청진동 한의학 공부

•1936년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에서 한약 및 양약 비교연구

•1938년 경기도 의학강습회의 촉탁됨

•1938년 5월 침례

등대사에  가입하게 된 이유? (치안유지법 1조)

“한의학을  연구하고 사람을 치료하다 보면 … 삶과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서 고민이 생겼고, … 

철학책이나  종교책을 찾아 연구해왔는데 … 결론을 얻을 수 없었 … 등대사의 성경 설명 책자를 통해 죽은 자의 상태를 

  알게 되었고, 부활의 희망도 알게 되었습니다.”

「피의자 신문조서」, MF7718_0289. 1939. 서울: 국사편찬위원회.

• 1941년 4월 8일 보석 신청 

• 1941년 4월 15일 병보석 출옥 

• 그러나 출옥 8시간 만에 사망

1939년 6월 29일 검거됨. 제부가 출옥을 돕고자 변호사를 보냈으나 …
“시누이  남편이 일본 정부의 관직에 있었는데 … 변호사를 보냈습니다. 
변호사는  남편에게 신사 참배를 하는 것만이 자기가 석방을 주선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남편은  그의 권고를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다시는 자기를 면회하러 오지 말라고 말하였습니다.” 

“남편이  형무소에서 석방될 것이므로 500원을 준비해 가지고 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나는  그 돈을 장만해 가지고 서대문형무소로 갔습니다. 쓸쓸하고 캄캄한 밤이었습니다. 
남편은  홑이불에 덮여서 바닥에 누워 있었습니다. 살았다기보다 죽음에 더 가까운 상태였습니다. 
2년 이상이나 남편을 감금하여 이 지경이 되게 하고서 이제 보석금으로 500원을 요구하다니! 
남편은  형무소를 나온 지 여덟 시간 만에 42세로 사망하였습니다.”

© Watch Tower Bible and Tract Society of Pennsylvania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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