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3년 4월 나치 독일에서 히틀러 숭배 거부와 징병 거부를 한 워치타워 문서 전도인들의 활동이
금지되었다.
이후 “1945년까지 1만여 명이 검거되었고 2000여 명이 사망했다.”
「병역을 거부한 일본인: 등대사의 전시하 저항」. 1972. 도쿄도: 이와나미 서점
(1933년의 일본 등대사원 1차) 검거는 독일 히틀러 정부의 정책을 도입한 것이다.
「특고 자료에 의한 전시하의 그리스도교 운동」.제 2권. 1972. 동경: 신코 출판사
“등대사의 종교 서적 13종 5만 부 압수”
「동아일보」,제2면, 1933.6.17
“서적 3000권 대동강변의 연기로”
「동아일보」,제3면, 1933.8.15
일본 정부는 … 조선에서도 등대사를 탄압하여 1933년 6월 17일에 경관들이 경성의 등대사 사무소를 급습하였는데, 단행본 및 소책자를 포함한 문서 5만 부를 압수하고, 수레 18대에 이르는 등대사 재산의 철거를 명했으며, 8월 15일에는 평양에 있는 조선인 여호와의 증인의 집을 덮쳐 3만 3000부의 문서를 압수했다. 하지만 이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등대사에 가담한 조선인의 신앙은 공고해져, 2차 대전 중에 감옥에 갇혀서도 비전향의 입장을 일관되게 고수한 문서전도인 옥응련, 최용원들이 생겨났고, 후에 옥사함에도 불구하고 성경 신앙의 입장을 바꾸지 않은 조선인 신자들도 생겨났다.”
「병역을 거부한 일본인: 등대사의 전시하 저항」. 1972. 도쿄도: 이와나미 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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